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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에게
청명한 가을 하늘에서 따스히 내리는 햇살을 등지니 저의 마음과 하나 된 그림자는
편지지위에 살아온 날들을 차분히 펼쳐낼 수 있도록 조용조용 뒤따릅니다.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이제야 겨우 내 한 몸 추슬러 집을 나섰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직행버스를 타고 편지쓰기 행사에 참가하여
저의 애틋한 사랑과 고마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올 여름 그 뜨거움 속에 화재로 전소된 공장,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뛰면서 괘도에 올려놓기까지 지새우던 나날의 연속에
흙먼지와 비지땀으로 범벅인 모습을 하고서도 가슴 벅찬 꿈을 희망으로 일궈내며
엷은 미소로 지칠 줄 모르는 젊음의 열정을 펼쳤는데,
악몽을 꾸었는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은행 빚과 타고 남은 잿더미만 허허로운 공장 터에 쌓여있었죠.
그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현혹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버거운 멍에를 지고,
빠져나와야 하는 늪의 깊이조차 간음하지 못하며 헛돌아가는 삶의 굴레 속에서
저는 붙박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지켜만 보았습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살아낸 것인지조차 모르는 동안에도
과거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는 상처가 곪아 피고름을 짜내는 아픔마저 내 몫이 아니라 부정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재개에 박차를 가하는 당신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저는
이제야 당신과 두 아이를 생각하며 일어섰습니다.
한 때 파산선고까지 생각하며 쓰디쓴 술잔을 비워내야만 잠들 수 있었던 막막하고 어두웠던 밤,
서로를 부등켜 안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가슴과 가슴,
또한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할까봐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듯 챙기며, 긴장의 끈을 조여 주던 우리 두 마음의 끈,
그러면서 차츰 주위의 선·후배, 동창, 각종 모임을 비롯한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 속에
재개에 보태어 쓰라며 정성을 모아 건네주던 그 따스한 손길 위에
공장을 다시 짓는 자재 하나 하나에도 고마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함께하며
그나마 기계는 가동되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고마운 나의 사람아!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지 모르나 오늘 하루가 미래를 위한 작은 시련일 뿐,
가족과 함께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겨낼 각오가 되었다던 아들이
언제부터인가 버스 값을 아끼겠다고 삼복더위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집에 들어오는 얼굴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던 땀방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교복에 베인 땀 내음은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답니다.
지금도 순간순간에 닥치는 고비를 넘겨가면서 세상으로 여린 내 마음 다찔까봐
염려하는 당신은 이제 제 앞에 다시 선 작은 거인이 되었습니다.
깊은 밤 당신의 코고는 소리가 정겹고, 그을린 얼굴이 건강해 보여 좋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새까만 작업복 깨끗이 손빨래 하던 내 마음은 지금의 햇살처럼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혼자서 쓸쓸히 집을 나섰지만 길의 코스모스가 반갑게 인사하고,
추수를 끝낸 너른 평원은 가을날의 풍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일어서는 내 마음을 포근히 안아주면서요.
그 포근한 느낌을 가슴에 안으며 아직은 덜 물든 단풍잎 하나 책갈피에 끼워두었다가
황혼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날 고즈넉한 눈빛을 마주하며 꺼내어 보이렵니다.
가장 곱게 우리의 삶을 물들여 주었을 예쁜 단풍잎을 말이예요.
사랑하는 나의 당신이여!
당신을 닮은 밖의 투명 창은 세상으로 비바람 막으며 오늘도 얼룩져 있습니다.
손이 닿지 않아 닦아줄 수 없지만,
이중창 안의 우리 가족은 그것이 얼룩이 아닌 당신이 가족을 위해
흘렸던 뜨거운 땀방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러한 마음의 창을 통해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더욱 크게 함박웃음을 짓겠습니다.
처음으로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내 사랑이 아니면 안 되었던 당신께 진실로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어제도 힘들었고, 오늘은 더 버겁겠지만,
당신이 고생시켜 미안하단 말을 할 때 그저 고개를 떨구며 일어섰지만,
말끔히 밥상을 비우고 잠든 당신의 머리맡에 앉아서도 아껴두었던 말
진실로 사랑합니다.
꽃 피고 진자리 파랗게 움돋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다섯 해를 지나면
그 뜨겁던 여름날의 상처와 아픔은 말끔히 씻어줄 것이며
편안히 쉬어갈 무성한 나무 그늘을 기필코 만들어 주리라
두 손 꼬옥 잡으며 하신 약속을 저는 믿으며
오늘도 열심히 뛰고 계실 당신의 건강을 빕니다.
영원히 사랑하는 나의 작은 거인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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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년 전의 일 입니다.
누군들 힘들지 않고, 누군들 버겁지 않을까요?
아픔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지금 슬프다고 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다시 일어 설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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